-
"며칠 걸려요?"에 답할 수 없는 뇌로 10년을 일했습니다adhd개발자이야기 2026. 8. 19. 12:52
"이 일 며칠 걸릴까요?"
10년 넘게 이 질문 앞에서 저는 답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3배를 불렀어요. 3일 걸릴 일이면 9일이라고 했습니다.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나서야 이게 성격 문제가 아니라 ADHD 시간관념의 특성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먼저 밝혀둘게요. 저는 의사가 아니고 이건 제 경험입니다. 이 글로 자가진단하지 마세요.
ADHD 시간관념 — 시간맹이라는 게 있습니다
ADHD 특성 중에 시간맹(time blindness)이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뇌한테 "며칠 걸려요?"라고 묻는 건 눈을 가린 사람에게 "저 벽까지 몇 걸음이에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답을 몰랐어요. 몰랐다고 말할 수 없어서 숫자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제 임상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일의 순서나 우선순위를 정해 계획대로 실행하기 어렵고, 흥미가 붙는 일부터 먼저 처리하다 마감을 놓치거나 지각하는 일이 반복된다고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가만히 있었어요. 제가 회사에서 3배를 부르게 된 경위가 제 성격도 게으름도 아니고 한 줄로 정리돼 있었거든요.
ADHD 지각, 늦으려고 늦은 적은 없어요
기록에 이런 줄도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려면 약속 시간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나오는 편이 낫다고요.
문장만 보면 무례한 사람 얘기 같은데, 저한테는 정확한 묘사였습니다.
저는 약속에 늦으려고 늦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다만 나가야 할 시각이 제 안에서 다른 눈금으로 흘렀을 뿐입니다.
이게 밖에서는 구분이 안 됩니다. 결과가 같으니까요. "성의가 없다"로 읽히고, 저는 그때마다 사과했어요. 사과는 했는데 다음번에 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사과로 고쳐지는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3배 견적이 만들어진 순간
신입 때 파워포인트로 ERD를 그리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어요. 하루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사흘이 걸렸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어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이런 기본적인 것도 제 시간에 못 해내면 개발자로서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닐까요?"
견적이 틀릴 때마다 틀린 건 견적이 아니라 제 역량으로 기록됐습니다.
그 뒤로 저는 낙관적인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어요. 3배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건 데이터가 아니라 불안이었어요
지금 보면 그 3배의 정체가 선명합니다.
과거에 비슷한 작업이 실제로 며칠 걸렸는지 저는 기록해본 적이 없었어요. 기록이 없으니 분포도 없고, 분포가 없으니 남는 건 감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이 틀렸을 때 돌아올 문책에 대한 공포요.
저는 그 공포에 이자를 붙여서 팔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건 이거예요. 저는 회의에서 "엑셀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닙니다"라고 말해 사람을 굳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틀린 말이 오가는 걸 못 견뎌서 관계를 몇 번이나 태워먹은 사람이요.
그런 제가 견적을 말할 때만은 태연하게 3배를 불렀습니다. 실제로는 사흘일 걸 알면서 아홉 날이라고요.
오랫동안 그걸 보험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보면 이름을 바꿔 부른 것에 가깝습니다. 정직함이 유일한 무기라고 믿는 사람이 시간에 대해서만은 정직할 수가 없었어요. 제 시간 눈금을 저조차 안 믿었으니까요.
장부가 두 개였습니다
그 전략은 작동하긴 했습니다. 꽂히는 날이면 5일짜리를 8시간에 끝냈고, 그렇게 번 시간으로 집중이 바닥나는 날들을 버텼어요.
그런데 작동했다는 것과 건강했다는 건 다릅니다.
제 머릿속엔 늘 장부가 두 개였어요. 밖에 말한 마감과 진짜 마감. 그 간극을 혼자 관리하는 일 자체가 또 하나의 업무였습니다.
시간을 못 보는 사람이, 시간에 대한 거짓말까지 관리해야 했던 거예요.
이게 ADHD 시간맹을 가진 사람이 조직에서 치르는 보이지 않는 원가입니다. 견적을 낼 때마다 우리는 숫자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그 숫자가 틀렸을 때의 시나리오를 계산합니다.
그래서 예측을 그만뒀어요
프리랜서가 되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외주에서 견적은 피할 수 없는 첫 관문이니까요.
회사에서는 견적이 틀려도 월급이 나왔어요. 이제는 숫자를 잘못 부르면 그게 곧 다음 달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흥미 붙는 일부터 손대는 사람이었어요. 견적서를 써야 하는 밤에 엉뚱한 리팩터링을 하고 있는 저를 몇 번이나 발견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팀장이 그걸 관리했는데, 이제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예측을 제가 하지 않기로.
지금은 견적 폼에 답하면 예상 금액 범위가 바로 나옵니다. 그 범위는 제가 감으로 지어내는 게 아니라 과거 실거래 데이터의 분포에서 뽑아요. 제 그날 눈금이 개입할 자리가 없습니다.
ADHD 시간관리로 힘드시다면
제 경험 기준으로만 말씀드릴게요.
- 기록부터 시작하세요. 이 작업이 실제로 몇 시간 걸렸는지 적어두면, 몇 달 뒤에 그게 분포가 됩니다. 감보다 훨씬 정확해요.
- 예측을 사람한테 맡기지 마세요. 특히 자기 자신한테요. 지난 데이터가 대신 말하게 하면 됩니다.
- 버퍼를 숨기지 말고 항목으로 꺼내세요. 숨긴 3배는 거짓말이 되지만, "검증 시간"으로 적힌 여유는 견적서 항목입니다.
고치려고 이십 년 했는데 안 됐어요. 눈금을 바꾸는 대신 눈금이 필요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게 됐습니다.
'adhd개발자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견적서 써야 하는 밤에 엉뚱한 리팩터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0) 2026.08.23 개방형 사무실에서 하루의 절반을 소리 견디는 데 썼습니다 (0) 2026.08.21 직설적이라 잘렸는데, 지금은 그게 제 제품입니다 (0) 2026.08.13 "너도 검사받아봐"를 두 번 듣고도 넘겼습니다 (0) 2026.08.11 5일치 일을 8시간에 끝내고, 그걸 숨겼습니다 (0)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