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개발자이야기

성인 ADHD 진단받고 바꾼 건 제 습관이 아니라 일하는 구조였어요

손영은 2026. 8. 4. 08:40

저는 외주 견적을 낼 때 항상 3배를 불렀어요. 3일이면 될 일을 9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그게 제 성격 문제인 줄 알았어요. 소심하거나, 게으르거나, 자신이 없어서라고요.

서른 넘어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나서야 그게 뭐였는지 알았습니다.

먼저 밝혀둘게요. 저는 의사가 아니고, 이건 제 경험일 뿐입니다. 이 글로 스스로 진단하지 마세요. 짚이는 게 있으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평가받으시는 게 맞습니다.

티가 안 났던 이유

제 경우는 조용한 쪽이었어요. 산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가 아니라, 앉아서 딴생각하는 아이였습니다. 성적이 나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아무도 몰랐어요. 저도 몰랐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원래 좀 그런 사람"으로 넘어갔어요. 문제가 드러난 건 학교가 아니라 직장이었습니다.

일에서 이렇게 드러났어요

시간이 안 읽혔어요. 3일 걸릴 것 같던 게 8시간에 끝나기도 하고, 2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 편차를 제가 예측 못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견적을 3배로 불렀습니다. 보험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공포에 이자를 붙여서 판 거였어요.

하기 싫은 일이 미뤄지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됐어요. 미루는 게 의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일은 시작 자체가 안 걸렸습니다. 정작 재미있는 일은 밥도 안 먹고 열두 시간을 했고요.

말이 관계를 망가뜨렸어요. 고객사가 엑셀 파일을 데이터베이스라고 부르길래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돌아온 건 "고객사를 가르치려 든다"였고, 저는 프로젝트에서 빠졌습니다. 맞는 말이 관계에서는 틀린 말일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고치려고 했고, 실패했어요

진단 후에 제일 먼저 한 건 고치려는 시도였습니다. 시간 관리 앱을 깔고, 뽀모도로를 돌리고, 할 일 목록을 만들었어요.

전부 오래 못 갔습니다. 며칠은 됩니다. 그러다 한 번 무너지면 앱을 지웠어요. 그리고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이것도 못 하냐고요.

몇 번 반복하고 나서 방향을 바꿨어요. 내가 매번 잘 해내야 하는 구조 자체가 잘못됐다고요.

그래서 구조를 바꿨습니다

견적이 대표적이에요. 제가 매번 "이번엔 며칠 걸릴까"를 판단하니까 매번 다른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판단하는 일을 아예 없앴어요. 가격과 범위를 미리 정해서 전부 공개해버렸습니다. (그 과정은 여기에 적어놨어요) 제 그날 컨디션이 개입할 자리를 없앤 거예요.

나머지도 같은 원리로 바꿨습니다.

  • 기억에 의존하던 걸 전부 파일로 옮겼어요. 회의는 녹음해서 텍스트로 바꿔놓습니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요.
  • 반복 문서는 양식을 고정했습니다. 견적서, 계약서, 청구서. 매번 새로 판단하지 않게요.
  • 하기 싫은 일은 첫 단계를 아주 작게 쪼갰어요. 시작만 걸리면 그다음은 굴러갑니다.

핵심은 의지를 늘리는 게 아니라 의지가 필요한 지점을 줄이는 것이었어요.

ADHD가 유리하다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요즘 ADHD를 재능처럼 말하는 얘기를 자주 봅니다. 저는 그렇게 말 못 하겠어요. 잃은 게 분명히 있습니다. 관계도, 기회도요.

다만 이건 말할 수 있어요. 고치는 데 쓰던 힘을 구조를 짜는 데 옮기고 나서 일이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바꾸는 건 십 년을 해도 안 됐는데, 판단할 자리를 없애는 건 하루면 됐어요.

혹시 지금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탓하고 계신다면, 한 번 방향을 바꿔보시면 좋겠어요. 못 하는 걸 잘하게 만들려 하지 말고, 그게 필요 없는 방식으로 짜는 쪽으로요.

그리고 짚이는 게 있으면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저는 그걸 너무 늦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