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아이는 성인 ADHD가 안 걸러집니다
성인 ADHD 진단을 받기 전까지, 저는 초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어요. 전교회장도 했고, 서울시교육청 과학영재원을 3년 다녔습니다. 자사고에 갔고요.
그리고 삼수를 했습니다. 경희대에 들어갔어요. 성인 ADHD 진단을 받은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였습니다.
이 두 줄이 같은 사람 이야기라는 게 오래 이해가 안 됐습니다.
먼저 밝혀둘게요. 저는 의사가 아니고 이건 제 경험입니다. 이 글로 스스로 진단하지 마세요.
성적이 알리바이가 됐어요
ADHD 증상 하면 보통 산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를 떠올립니다. 저는 그 그림에 하나도 안 맞았어요. 흔히 조용한 ADHD라고 부르는 쪽이었습니다. 앉아 있었고, 시험을 잘 봤고, 상을 받아 왔거든요.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ADHD한테 유리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목이 다양하고 활동이 자주 바뀌어요. 새로운 걸 좋아하는 뇌한테는 그게 지루할 틈이 없는 환경입니다. 한 가지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특성도, 초등학교 수준의 분량 앞에서는 그냥 "집중력 좋은 아이"로 보였고요.
그래서 아무도 이상하게 안 봤습니다. 선생님들한테 저는 문제 없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교실에서는 계속 사고가 났어요
선생님이 "이건 뭘까요?" 하고 물으면 저는 바로 답을 외쳤습니다. 그게 진짜 질문이 아니라 설명으로 넘어가기 전에 던지는 말이라는 걸 몰랐어요. 교실이 조용해지고 선생님 표정이 굳었는데, 저는 왜 혼나는지를 몰랐습니다. 답이 맞았거든요.
급식 시간에는 이런 걸 물었어요. 왜 학생은 밥당번이 퍼주는데 선생님은 직접 담으시냐고요. 저는 그냥 궁금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반성문을 두 장 썼어요.
의도와 해석이 계속 어긋났습니다. 저는 정보를 물은 건데 상대는 도전으로 받았어요. 이게 몇 년씩 반복되면 사람이 이상해집니다. 왜 나는 남들이 그냥 아는 걸 모를까. 왜 내 말은 항상 다르게 전달될까.
성적표에는 이런 게 하나도 안 적힙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유리한 게 사라졌어요
중학교부터는 판이 달랐습니다. 사람 관계가 복잡해지고, 암묵적인 규칙이 늘어나요. 초등학교에서 성적으로 가려졌던 부분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였어요. 범위가 넓어지고 기간이 길어지면, 하루 이틀 몰아쳐서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달에 걸쳐 계획을 세우고 그걸 유지해야 합니다. 저는 흥미가 붙은 과목은 파고들었고 아닌 과목은 손도 안 댔어요. 편차가 커졌습니다.
삼수를 한 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어요. 재수, 삼수를 하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되는 날은 열두 시간을 하고, 안 되는 날은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걸 의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담사가 한 말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상담을 이어가면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사회적 기술 수준이 세 살 정도라고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설명이 됐거든요. 인지 능력과 사회적 이해가 같은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성적이 좋다고 눈치가 같이 좋아지는 게 아니었어요.
문제는 학교도, 회사도 그 둘을 같은 사람 안에서 함께 기대한다는 겁니다.
늦게 안 게 손해만은 아니었어요
성인 ADHD를 늦게 알아서 잃은 게 있습니다. 잘린 회사가 있고, 끊긴 관계가 있어요. 그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다만 늦게 안 덕분에 확실해진 것도 있어요. 저는 스스로를 고쳐보려고 이십 년 넘게 시도한 사람입니다. 그게 안 된다는 걸 아주 확실하게 알아요. 그래서 진단받고 나서 저를 바꾸는 데 시간을 안 썼습니다. 대신 제가 매번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짜는 쪽으로 갔어요.
견적을 매번 다르게 부르던 걸 정찰제로 고정한 것도 그거고요. 기억에 의존하던 걸 전부 파일로 옮긴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금 자녀가 성적이 좋아서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자꾸 이상한 데서 부딪힌다면, 성적을 근거로 넘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그 성적이 이십 년짜리 알리바이였습니다.